대통령의 말

 

 

‘참 나쁜 대통령’, 이 말은 박근혜 대통령이 2007년 의원 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제안 기자 회견을 듣고 처음 내뱉은 말이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국민은 불행하다’고 했다. 지금 박 대통령은 자신을 어떤 대통령이라고 생각할까? 다른 것은 몰라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요즘처럼 불행하다고 느낀 적도 없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모든 것이 대통령으로부터 기인한 결과다. 삼단논법에 따르면 고로 지금 대통령은 참 나쁜 대통령이 된다.

시절이 시절인 만큼 요즘 이목을 끄는 책이 하나 있다. 바로 <대통령의 말하기>다. 이것은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받아 적은 500여 권의 휴대용 포켓 수첩과 100여 권의 업무 수첩, 1400여 개의 한글 파일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이다. 저자는 10년 동안 노무현 대통령의 말과 글이 되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노무현 대통령이 어떻게 말했고 또 말을 잘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어디 말을 잘하기 위해 고심하는 사람이 대통령뿐이겠는가. 누구나 나이가 들수록, 직책이 높아질수록 말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그만큼 말에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한낱 범부(凡夫)의 한마디도 천금(千金)에 비유되는데 대통령은 말해 무엇하랴. “국가 지도자의 말은 말재주 수준이 아니고 사상의 표현이고 철학의 표현이다. 가치와 전략 그리고 철학이 담긴 말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대통령 연설문이 자격 없는 사람에 의해 이리저리 유린당한 작금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참담한 현실과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의 입을 통해 ‘통일 대박론’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박’이란 단어 자체가 근본 없이 쓰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대박은 한마디로 큰돈을 번다는 속된 표현이다. 통일 대박론을 요약하면 통일이 되면 떼돈을 번다는 얘기다. 표현에도 격이라는 것이 있다. 통일로 인해 장기 불황에서 벗어나 제2의 경제 부흥기를 맞는다고 해도 통일 대박론은 통치 철학은 고사하고 대통령의 통일관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북한은 결코 쉽게 붕괴될 만큼 체제가 불안하지도 않거니와 설령 북한이 붕괴된다고 해도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이 남한 주도의 흡수 통일을 손 놓고 바라만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어찌해서 통일이 된다 해도 대박은커녕 통일 비용이 부담이 될 수도 있다. 통일은 인내를 갖고 길게 봐야 하고, 고도의 정치적·외교적 전략과 올곧은 민족관이 수반돼야 한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마치 금방이라도 북한 체제가 무너질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통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꼼수로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 통일 대박론이란 말이 통일에 무관심한 요즘 세대에 어필하기 위한 강조 용법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의 말에는 격과 함께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

만약 청와대에서 제대로 된 사람들에 의해 보좌를 받았더라면 적어도 대통령의 연설문에서 대박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 농단인지 모르겠지만 오죽했으면 대통령 연설문에서 ‘우주의 기운(機運)’, ‘혼(魂)의 비정상’, ‘창가문답’ 따위의 용어가 난무했겠는가.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를 뤼순 감옥이 아닌 하얼빈 감옥이라고 언급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청와대는 비선 실세에게 대통령 원고를 고치게 할망정 자체 검증 시스템 따위는 아예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 11월 4일 발표한 박근혜 대통령의 두 번째 사과문은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듯 국민들을 더욱 들끓게 했다. 다음 날 광화문 광장에는 20만 명의 시민이 모여들어 밤늦게까지 촛불 시위를 벌였다. 대통령의 사과문은 여염집 아낙네의 자기 푸념식 넋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TV를 통해 접한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는 보는 이로 하여금 허탈한 쓴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건국 이래 최대의 국정 농단 사태를 대통령은 한낱 개인의 외로움 때문이라는 변명으로 일축했다. 대통령이라면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국민의 뜻을 받들어 국정 공백 상태를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한 소신을 밝혔어야 옳다. 외로워서 그랬다는 것은 결코 변명이 될 수 없다.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다. 대통령은 공인 중의 공인으로서 사사로운 감정을 국민들에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

“말은 한 사람이 지닌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빈곤하면 말도 빈곤하다. 결국 말은 지적 능력의 표현이다.”

이 말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은 말만 잘하고 일 못하는 대통령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연설문조차 스스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대통령인 셈이다. 말 잘하는 대통령을 원하는 것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우리는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나 영국의 처칠 수상처럼 세계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진심 어린 말 한마디다. 이 시점에 와서 노무현 대통령의 말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말이 주옥 같은 명언이라서가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에 고뇌와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마따나 말을 잘한다는 것은 소통을 의미하며, 민주주의의 핵심은 소통을 통한 설득의 정치다. 설득은 말이나 글을 통해 전달된다는 사실을 박근혜 대통령도 이번 기회를 통해 통렬히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편집장 민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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