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콰이어>는 재미있다

<에스콰이어>와 함께한 세월만 올해로 20년째다. 30대 초반의 열혈 청년 시절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이 어느덧 반백의 중년에 접어들었다. 한평생 <에스콰이어>를 위해 청춘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는 내 인생에서 <에스콰이어>를 지워버리면 뭐가 남나 두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에스콰이어>에 대한 분리불안장애를 앓을 정도로 집착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지 오래됐다. 이미 꽤 오래전부터 <에스콰이어>와 이별할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 시대가 바뀌고 패러다임이 바뀌어가는 마당에 <에스콰이어>도 마땅히 변화를 맞이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집장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에스콰이어>만의 DNA와 편집 원칙이다.

1995년 8월, 나는 <에스콰이어> 창간 준비 호를 들고 뉴욕 허스트사를 찾았다. 창간 준비 호에 대한 평가도 받을 겸 미국 <에스콰이어> 편집장에게 편집의 한 수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미국 <에스콰이어> 편집장은 바쁘다는 핑계로 미팅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당시 미국 <에스콰이어> 편집장은 에드워드 코스너로 전 <뉴스위크> 편집장 출신의 거물급 인사였다. 상대적으로 나는 이렇다 하게 내놓을 것이 없는 뉴욕 초행길의 촌놈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 본 맨해튼의 마천루에 넋이 나가 있었으니 말이다. 궁즉통(窮則通)이라, 때를 써가며 집요하게 만나줄 것을 요구했더니 내게 단 20분의 접견 시간이 주어졌다. 에드워드 코스너 편집장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나는 많은 질문을 준비해 갔다. <에스콰이어>는 대한민국에서 처음 선보이는 남성지라 참고할 만한 선례도 없고 편집 노하우도 전혀 없었던 터라 참으로 막막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20분이란 시간은 모든 궁금증을 풀기에는 너무 짧았다. 한 가지 질문만이 유효했다. 나는 화룡점정을 찍을 만한 촌철살인의 질문이 필요했다. 궁리 끝에 찾아낸 것이 편집 원칙이었다. <에스콰이어>를 만드는 데 반드시 지켜야 할 편집 원칙 말이다.

당시 에드워드 코스너 편집장은 60대 중반의 초로의 신사였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뉴욕의 편집장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친절했고 인터뷰 내내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에게 서른다섯 살 된 아들이 있는데 그가 재미있어하고, 호기심을 보이고,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에스콰이어>의 기삿거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게 <에스콰이어> 편집 원칙이란다. 첫 번째 느낀 것은 실망이었다. 그의 서른다섯 살 된 아들을 인터뷰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했다. 20분이란 짧은 시간은 아들 이야기로 허망하게 지나가버렸다. 아들의 직업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아마도 미국의 여피족에 대한 설명이었던 것 같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에드워드 코스너 편집장의 이야기를 곱씹어보았다. 혼란스럽던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내가 아둔하여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을 뿐, 뭔가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했다. 순간 세 단어가 형광등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당시 미국 <에스콰이어>의 주 타깃은 35세의 여피족으로 그들이 재미있어하고 호기심을 보이고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기사화할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편집 원칙은 다름 아닌 재미(interest), 호기심(curiosity), 열정(passion) 이 세 단어로 정리되었다. 그 말을 달리 해석하면 한국에서 창간하는 <에스콰이어>는 당시 30대 초반이던 내가 재미, 호기심, 열정을 보이는 것은 다 기사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에드워드 코스너 편집장은 그 말을 에둘러 설명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네 맘대로 만들라’는 미션이다. 하지만 말처럼 간단하면서도 무척 힘든 일이 아닌가. 내가 편집 원칙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

20년 동안 나는 이 원칙에 따라 <에스콰이어>를 만들어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에스콰이어>만의 편견과 독단이 생겼고 그것이 정체성이 되었다. 이제 민희식이 만들어온 편견과 독단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다음 달부터 새 편집장에 의해 새로운 도그마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변화는 있으되 흥미, 호기심, 열정 본위의 편집 원칙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Men are interested in Esquire.” 이것이야말로 에스콰이어가 계속해서 추구해야 할 미션이다. <에스콰이어>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여기엔 더 이상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다.

편집장 민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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