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아직 있었다. 검고 작은 나침반이었다. 3년 전 <에스콰이어> 2014년 6월호에 ‘세월호 그날 이후’라는 기사를 쓸 때 샀던 촬영 소품 여분이었다. 망치로 나침반 몇 개를 때려 부쉈었다. 산산조각 난 나침반은 세월호 참사로 갈 길을 잃어버린 대한민국이었다. 세월호 참사 3주기였던 지난 4월 16일은 <에스콰이어> 2017년 5월호 마감 마지막 날이었다. 3년 전 그날을 생각하면서 하루 종일 나침반을 만지작거렸다. 나침반을 매만질 때마다 가느다란 바늘이 흔들거리며 방황했다.

3년 전 그날 막바지 마감 중에 세월호 참사 소식을 접했다.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다. 나중엔 억장이 무너졌다. 그날 저녁 데스크에게 먹먹해진 눈빛으로 짧게나마 세월호 추모 기사를 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겼다. 데스크는 고개를 저었다. <에스콰이어>는 패션지답게 즐겁고 기뻐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세월호 그날 이후’가 한 달 뒤인 2014년 6월호에야 실린 까닭이다.

다시 보니 과연 <에스콰이어> 2014년 5월호엔 비극의 전조나 기운 따윈 없다. 남자의 욕망만이 넘실댄다. 그런 <에스콰이어> 에디터인 주제에 한 달 내내 데미안 라이스의 ‘콜드 워터’를 듣고 또 들었다. ‘<에스콰이어>가 시사지냐’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울부짖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직접 만나고 보고 들었다. 타는 듯한 초여름의 햇살 아래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은 경찰 병력에 포위된 채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세월호 3주기에 ‘세월호 그날 이후’를 다시 읽었다. 이렇게 써놓았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를 내파시켰다. 물론 대한민국은 겉으론 아직도 멀쩡하다. 청와대는 건재하다. 정권도 변함없다. 국정은 계속된다. 정치도 이어진다. 실상은 다르다. 대한민국이란 존재는 이미 침수됐다. 세월호 참사로 국가의 무능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체제의 앙상한 뼈대가 다 드러났다.” 이 문장을 쓸 때 들었던 데미안 라이스의 처연한 노랫말이 다시 한번 귓가에 맴돌았다. “Lord, can you hear me now?” 실종된 국가를 부르는 소리로 들렸다.

‘세월호 그날 이후’엔 이렇게도 썼다. “한국 정치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솔직히 허튼소리였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3년이 흘렀지만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한국 정치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무능했고 무치했던 대통령은 지금 구치소에 있다. 정작 헌법재판소가 밝힌 대통령 탄핵 인용 사유엔 세월호 7시간의 직무유기가 빠져 있었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던 순간 세월호 유가족들은 방청석에서 통곡했다. 자식을 잃고 국가에 외면당했던 유가족들의 한 맺힌 울음소리가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 소리를 현장에서 들었다. 그런데도 헌법상으론 국민을 재난으로부터 구하지 못한 죄는 도무지 죄가 아니었다.

후안무치했던 대통령을 대신하겠다고 나선 대선 주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안산시에서 열린 세월호 3주기 기억식엔 과거 여당이었던 자유한국당의 대선 후보를 제외한 4명의 대선 후보가 모두 참석했다. 재발 방지와 진상 조사를 약속했다. 말이야 쉽다. 미덥진 않다. 모두가 세월호 앞에서 고개를 숙일 뿐 누구도 고개를 들어 세월호를 직시할 만큼 용감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분명 국가의 실패다. 정작 세월호가 국가의 실패라는 걸 인정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국가 지도자가 국가의 실패를 얘기하는 순간 모욕감을 느끼는 국민이 많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경제적 번영을 개인 인생의 자랑으로 여기는 산업화 세대에게 세월호 참사는 구조적 실패가 아니라 불의의 사고로 축소하고 싶은 수치다. 집권 이후 산적한 현안을 해결해야 하는 대통령은 중장년 이상 보수층의 지지가 필요하다. 자연히 세월호는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국가의 실패를 외면하고 새로운 국가를 약속한다는 건 말장난에 불과하다.

한국 정치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달라지지 않았지만 돌아보니 세월호 이전과 이후에 바뀐 것이 있었다. <에스콰이어>였다. 적어도 한 사람의 에디터가 그날 이후 <에스콰이어>에 조금씩 다른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에스콰이어>가 즐거움과 기쁨만이 가득한 욕망 덩어리여야 하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에스콰이어>에 통찰과 성찰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에스콰이어>를 취향 있는 남자들의 통찰과 성찰이 있는 미디어라고 홀로 재정의하기 시작했던 건 말이다. 원래 세상이 바뀌는 건 이런 식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자신을 바꾼다. 작은 것부터 바뀐다. 작은 조직이 바뀐다. 문화가 바뀐다. 나라가 바뀌고 변할 것 같지 않던 세상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작고 검은 나침반을 하루 종일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에스콰이어>의 변화를 모색했다. 그렇게 세상의 작은 변화를 도모했다. 그렇게 세월호를 추모했다.

편집장 신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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